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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2022. 9. 21 - 2023. 2. 26.

by 김띵아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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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에 포함된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호안 미로의 회화 7점과 파블로 피가소의 도자 90집을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이들은 미술 증심지였던 파리에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에, 혹은 동료로 만나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며 20세기 서양 현더 미술사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간 거장들입니다. 이번 전시는 여덟 명의 거장이 파리에서 맺었던 다양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회화 간 관계 성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도자와 다른 거장들의 회화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KN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통해 거장들이 서로에게 표현한 우정과 존경의 감정으로 충만했던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피사로와 고갱

: 스승과 제자도 만난 파리의 두 거장
오늘날과 같은 파리의 모습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낡고 오래된 중세식 도시 파리를 현대화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습니다. 에펠탑과 신강 변의 다리들, 철골과 유리를 사용한 건물들, 가로등 같은 전기 조명으로 빛을 밤힌 넓은 도로,그리고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여가 시설도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불과 몇십 년 만에 전례가 없는 현대적인 대도시가 탄생한 것입니다 젊은 미술가들도 파리의 현대적인 모습을 새로운 예술의 주지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캔버스 위에 포작해 낸 파리의 모습에서 인상주의 미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1830-1903)는 파리 근교의 풍투아즈에 체류하며 그곳의 전원 풍경과 대도시
파리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인상주의의 거장입니다. <퐁투아즈 곡물 시장> (1893) 처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풍경 역시 피사로가 선호하던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점은 작가들의 발굴과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던 스승 같은 존재였는데, 폴 고갱(1848-1903도 그의 제자였습니다.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던 고갱은 피사로가 참여했던 1874년의 (제1회 인상주의 미술전) 을 접한 뒤 화가로의 전업을 꼼꿉니다. 피사로는 <센강 변의 크레인 (1875)을 포함에 고깅이 이 시기에 그린 초기작을 보고 그의 꿈을 응원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따라 풍투이즈로 이주한 고갱이 인상주의 풍경화를 완벽하게 그릴 수 있도록 지도했고 (인싱주의미술전) 에도 참여할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스승 피사로의 따듯한 응원은 고깅이 무명의 화가에서 현대미술의 기장으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피사로의 고깅이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을 두 사람의 작품을 통해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폴 고갱 센강 변의 크레인 1875 캔버스에 유채 77.2X119.8cm

폴 고갱은 증권 거래소 직원으로 일하던 중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고 화가가 될 결심을 하였고, 미술 수업도 받기 시작 했습니다. <센강 변의 크레인)(1875)은 바로 이즈음에 그려진 고갱의 초기작 중 하나입니다. 거대한 크레인이 설치된 신강 변의 풍경과 아이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포착해 그린 이 작품은 인상주의풍의 야외 풍경화로 볼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고갱은 근대화된 대도시 파리의 풍경보다는 파리 근교의 전원 풍경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발전하는 서구 문명과 대비되는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고갱은 결국 1891년 파리를 떠나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이주해 이국적인 자연과 인물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했고, 1903년 그 지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 1893 캔버스에 유채 46.5x39cm

카미유 피사로는 모네, 르누아르와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입니다. 마지막 (인상 주의 미술전> 이 개최되었던 1886년 즈음부터 4년여간 피사로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젊은 작가들이 이끌었던 신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이 그룹의 작가들은 점을 찍듯이 채색해 그리는 점묘 기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에서도 여전히 신인상주의의 점묘 기법이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 미술 운동을 주도했던 것에서 더 나아가 60대의 나이에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된 신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갱, 반 고흐, 앙리 마티스, 폴 세잔 같은 미래의 거장들이 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피사로는 인상주의와 그 이후 세대를 연결하는 가고 역할을 했던 작가로 평가됩니다.


모네, 르누아르, 피카소

: 우정과 존경으로 서로를 빛낸 거장들
인상주의 미술가들 중에서도 유독 친분이 두터웠던 클로드 모네(1840-1926)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파리 근교에서 함께 야외 풍경을 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의 색채와 형태가 빛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관찰하게 된 이들은 그 순간을 포착해 그리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모네는 물과 안개, 눈과 바람 등 유동적이고 변화가 많은 자연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1891년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정원과 연못을 주제로 한 《수련) 연작을 제작하는 데 몰두합니다.
르누아르는 야외 풍경 못지않게 카페나 유원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포착 하는 것에도 흥미를 느꼈습니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미술에 매료된 이후로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고전적인 회화를 주로 그렸는데, 노란 모자에 빨깐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 (1917-1918)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이 제작되던 해인 1917년 파블로 피카소
(1881-1973)도 이탈리아에서 고전주의 미술을 재발견하면서, 르누아르의 작품들로까지 그 관심이 이어지게 됩니다.
1904년 고향인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불과 10여 년 만에 청색시대, 장밋빛시대, 입체주의시대를 거치며 젊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지만, 르누아르의 작품은 그에게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성을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삼았던 점도 피카소가 르누아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여성을 재현하는 두 거장 특유의 방식은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르누아르의 회화와 피카소의 도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19년 피카소는 그해에 타계한 르누아르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거장 르누아르에게 바치는 피카소의 존경의 마음 그 자체였습니다.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17-1920 캔버스에 유채 100x200.5cm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인상, 해돋이> (1872)라는 클로드 모네의 작품에서 유래했을 만큼,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모네입니다. 그는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색채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해 다양한 연작을 제작했는데, (수련) 연작도 그중 하나 입니다.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을 포함해 총
250여 점으로 이뤄진 이 연작은, 하늘과 연못, 구름과 수련이 뒤섞여 하나의 흐릿한 평면처럼 보입니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서 (수련) 연작을 그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네는 인상주의 미술을 통해 대상을 평면적으로 그리는 평면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갔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의 현대미술은 인물이나 풍경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대신 평면적으로 그리면서 대상을 추상화해 나가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런 이유로 모네의 (수련) 연작은 현대회화, 특히 주상 미술의 윤반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 (독서) 1917-1918 캔버스에 유채 46.5X57cm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3세에 도자기 그림 공방의
견습생으로 시작해 20대 초반 파리에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만난 모네나 피사로 같은 동료 작가들과 함께 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르누아르는 풍경보다는 카페나 무도회장, 유원지 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포착해 내거나 사람들의 옷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의 묘사를 통해 눈부시게 밝은 야외의 분위기를 묘사하기를 즐겼습니다.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 (1917-1918)처럼 여성 인물 역시 그가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입니다.
앙드레는 1915년부터 르누아르가 작고한 해인 1919년까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모델입니다. 르누아르가 사망 하기 1년 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여성을 입체적으로 묘사 하는 고전적인 기법을 따르면서도, 대상을 빠르게 포착해 그린 듯 느껴지는 자유분방한 필치를 통해 인상주의의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피카소, 미로, 달리

•파리의 스페인 화가들과 에콜 드 파리
피카소와 호안 미로(1893-1983),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스페인 출신의 작가들이지만 이들이 서로를 만난 장소는 파리였습니다. 미로는 1920년 파리를 처음 찾았고, 그곳에서 이미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카소를 만났습니다. 피카소는 미로가 파리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왔고,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평생에 결쳐 친구이자 동료로서의 관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6년 뒤인 1926년에는 달리도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처음 파리를 찾았습니다.
이때 달리에게 피카소를 소개해 주고, 2년 후에는 초현실주의 작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며 미래의 초현실주의 거장 달리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이가 바로 미로였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 미로, 달리가 파리에서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던 모습은 국제적인 미술 중심지였던 20세기 초 파리의 상황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입니다. 외국인 미술가들의 파리 유입이 급증하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에콜 드 파리'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였는데, 각자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파리에서 접한 새로운 미술 경향을 결합한 외국인 미술가들의 에콜 드 파리 스타일도 등장 합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필두로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작가 였지만 늘 고국의 문화적 전통을 잊지 않았습니다. 피카소가 스페인의 전통 기에인 투우를 작품의 주제로 다양하게 활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피카소, 미로, 달리는 각자의 에콜 드 파리 스타일을 만들어냈지만, 이번 전시에 출품된 세 사람의 작품에서는 몇 가지 공통전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1940)처럼 피카소의 도자에서도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 새, 별이 있는 밤의 풍경을 추상화한 미로의 <회화> (1953)는 사람과 새를 주제로 한 피카소의 도자 작품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1940 캔버스에 유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마 종족 켄타우로스와
이들의 몸에 있는 육아낭에서 아기들이 빠져나오는 순간을 묘사한 <켄타우로스 가족> (1940)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강박증과 성적
환상에 대한 해답을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되는 순간 인간이 최초의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정신분석학 이론에 심취했고, 이 때문에 자궁과 유사하면서도 언제든지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육아낭을 가진 켄타우로스 종족을 부러워 했습니다. 꿈과 무의식, 때로는 정신 착란의 상태에서 본 기이한 풍경들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사

호안 미로 회화 1953 캔버스에 유채 96x376cm

호안 미로는 1920년대 초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달리가 대상을 고전적으로 그리는 방식의 초현실주의 미술을 제작했던 것과 달리, 미로는 무의식이나 환각 상태에서 대상을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미술을 만들어냈습니다.
우연성과 즉흥성에 기반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중시했던 만큼, 미로의 그림은 대상을 기호처럼 단순화해 그리거나 즉흥적으로 그린 드로잉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회화 (1953)는 여성, 새, 별, 밤 등 인물과 동물, 자연과 우주의 시공간이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미로의 대표작입니다.


피카소와 샤갈

•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낸 거장들
마르크 샤갈(1887-1985)은 1910년 고향 러시아를 떠나 미술 중심지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습니다. 여전히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리면서도 사같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입체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아들여 화면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분할하는 구성법을 시도 했습니다. 입체주의 미술의 영향력이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만큼 사 역시 그 운동을 주도했던 피카소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지만, 이들의 만남은 쉽게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뒤이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사갈은 10여 년간 고향에 머무르게 되는데, 피카소를 만나지 못한 채 파리를 떠나게 된 아쉬움을 달래고자 1914년에는 <피카소를 생각하며> 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유태인이었던 사같은 제2자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나지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체류하는데, 이 시기에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 덕에 두 사람은 전정 중료 후인
1940년대 말 드디어 조우합니다.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피카소가 도자기를 제작하던 남프랑스의 발로리스였습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도자기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갈이 직접 발로리스를 방문했고,두 사람은 마두라 공방에서 함께 도자기를 만들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된 만남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샤갈의 회화에는 염소나 물고기 같은 동물들, 꽃과 정물,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풍경들이 가득합니다. 샤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주제들을 피카소의 도자에서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인간, 동물, 자연이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이야 말로 피카소와 샤갈이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가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크 샤갈 결혼 꽃다발 1977-1978 캔버스에 유채 91.5x72.8cm

마르크 샤갈의 작품은 꿈과 환상의 세계를 다루지만 그의 인생은 그다지 평탄치 못했습니다. 샤같은 제1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러시아 혁명을 겪은 뒤 1923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10여 년 뒤인 1939년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하늘을 나는 연인의 모습으로 샤갈의 작품에 자주 등장 했던 그의 부인이자 뮤즈 벨라마저 사망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두 자례의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벨라의 죽음 등 과거의 수많은 고난을 뒤로한 채 다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순간을 노래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결혼 꽃다발〉 (1977-1978)은 그가 말년에 되찾은 새로운 사랑과 행복의 순간을 담아낸 샤갈의 대표작입니다.

자클린의 옆모습(뒷면)1956, 적토, 39x39x45cm

작품의 뒷면을 살펴보면 피카소 도자 에디션의 표기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두라 플랭 푸(Madoura Plcin Feu)'는 '마두라의 타오르는 불 이라는 뜻으로 마두라 공방에서 제작한 도자기를 상징하는 표식입니다. '앙프랭트 오리지날 드 피카소(Empreinte Originale de Picasso)'는 피카소가 직접 디자인한 그림을 석고 들 위에 새긴 뒤 그것을 새로운 도자기 위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한 에디션 작품을 의미합니다. 손 글씨로 쓰인 숫자는 에디션의 수량을 나타냅니다. 에디션 작품의 제작 연도는 피카소가 그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넨 시기를 기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회색 바탕 위의 세 물고기(뒷면), 파블로 피카소, 1957 적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뒷면 장식, 40x40x5.5cm
물고기, 파블로 피카소, 1952 적토, 화장토 장식, 13x20.5 x9cm

피카소에게 비둘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새입니다. 유년 시절부터 비둘기를 그렸을 뿐 아니라, 1949년에는 흰 비둘기를 주제로 한 석판화 연작을 50여 점 가까이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에 피카소는 파리에서 열린 '평화 회의의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게 되는데, 여기에도 흰 비둘기를 등장시켰습니다. 비둘기가 고대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피카소 역시 흰 비둘기의 상징성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한 것입니다.

새 76번, 파블로 피카소, 1963 백토, 화장토, 흑색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시유, 25x25x3.5cm
밀짚 위의 비둘기, 파블로 피카소, 1949 백토, 화장토, 백색 에나멜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31x38x4cm

작품 뒷면에 손 글씨로 쓰인 '다프레 피카소(D apres Picasso)는 피카소가 제작한 원본 도자기를 보고 마두라 공방의 장인들이 그대로 제작한 작품을 의미합니다. 점차 '에디션 피카소'로 표기법이 변경되었습니다.

점은 바탕 위의 투우, 파블로 피카소, 1953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31x38x4.5cm
창, 파블로 피카소, 1950 백토, 화장토 장식, 유약 시유, 39x39x3.5cm
투우, 파블로 피카소, 1953 백토, 산화 파라핀, 백색 에나멜 장식, 43x43x4cm
황소가 있는 스페인 접시, 파블로 피카소, 1957 적토, 흑색 파티나 장식, 나이프 각인, 부분 유약 시유 뒷면 장식, 40.5x40.5x4.5cm

<황소가 있는 스페인 접시>(1957)는 접시의 중앙이 움푹하게 들어간 스페인의 전통 접시 형태를 이용해 제작한 작품입니다. 앞면에는 스페인의 상징인 황소를, 뒷면에는 스페인 접시에 자주 활용되는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려 넣었습니다. 스페인 접시는 마두라 공방에서 일반적으로 제작하던 접시 형태가 아니었던 관계로 공방의 장인들이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접시를 특별 제작했습니다. 이처럼 마두라 공방에서 생산되는 전형적인 도기와는 다른 형태의 작품을 제작하고자 할 경우에는 피카소가 먼저 드로잉을 한 뒤, 그에 따라 장인들이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피카소가 미술을 처음 시작했던 유년 시절부터 말년까지 가장 많이 제작한 작품은 초상화였습니다. 인물은 그에게 가장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자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역시 '얼굴 입니다. 피카소는 동일한 모티프를 반복해서 그리기를 즐겼는데, 이러한 제작법은 하나의 대상을 다양하게 확장해 가는 실험의 과정이었습니다.
도자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얼굴도, 석고 틀 위에 백토를 올린 뒤 찍어 만든 작품부터 백토 위에 검은 화장토를 채색하고 나이프로 얼굴선을 새긴 후 유약을 칠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기법에 따라 무한하게 확장되었습니다

사각형의 얼굴, 파블로 피카소, 1956, 백토, 41x41x4cm
선으로 표현한 얼굴, 파블로 피카소, 1956, 백토, 40x40x4.5cm
기하학적 얼굴, 파블로 피카소, 1956, 백토 32x38x3cm
검은 얼굴, 파블로 피카소, 1948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23.5x23.5x3cm
검은 얼굴, 파블로 피카소, 1948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41x41x4cm
얼굴 197번, 파블로 피카소, 1963 백토, 화장토, 에나멜 장식, 유약 시유, 25.5x25.5x2.8cm
회색 얼굴, 파블로 피카소, 1953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부분 유약 시유, 31x38x4cm

염소는 피카소가 좋아하던 동물 중 하나였습니다. 남프랑스에 체류하 는 동안에는 애완용 염소를 직접 키우기도 했고, 도자나 조각 등 다양 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에 머물렀 년 1950년 등신대 크기의 염소 조각을 제작했고, 1952년에는 자신의 도자 전시회 포스터를 염소 이미지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염소 머리, 파블로 피카소, 1952 백토, 화장토,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시유, 40x41x5cm
염소 머리, 파블로 피카소, 1952 백토, 화장토,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시유, 40x40x4cm
염소 머리, 파블로 피카소, 1950 백토, 산화 파라핀 장식, 유약 시유, 26x26x3cm

정물과 풍경은 1910년대부터 피카소의 작품에서 주요한 소재로 활용 되었고, 도자에서도 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자 작품은 접시나 화병, 주전자 같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들을 이용해 제작한 만큼, 피카소에게 꽃이나 정물, 풍경은 도자에도 어울리는 소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꽃다발, 파블로 피카소, 1955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35x29.5x3.5cm
사과와 꽃다발, 파블로 피카소, 1956 백토, 산화 파라핀, 산화물 장식, 유약 시유, 24✕24✕2cm
풍경, 파블로 피카소, 1953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부분 유약 시유, 41x41x4.5cm
사각형 속의 춤추는 사람들 B, 파블로 피카소, 1971, 적토, 15x14.5x1cm
마름모 속의 춤추는 사람과 암사슴, 파블로 피카소, 1971, 적토, 15x15x1cm
트램펄린 위의 세 사람, 파블로 피카소, 1956, 백토, 흑색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시유, 19x19x2.5cm

피카소는 1910년대에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인 반레 뤼스의 공연을 위한 무대 디자인에 참여했고, 발레단의 해외 공연에 동행했을 정도로 발레와 춤의 세제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를 제기로 무용수들을 그린 작품들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제대전 이후로는 손을 맛잡고 원형으로 회전하며 군무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평화의 상징처럼 작품에 등장 시키기도 했는데, 이러한 춤의 형태는 도자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 명의 춤추는 사람들, 파블로 피카소, 1956 백토, 흑색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시유, 24x24x1cm
플루트 연주자와 기사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956, 37x36x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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